우리말 중에 ‘원경(原景)’이나 ‘원경(原境)’이라는 낱말은 없다. 내가 만들어낸 조어일 뿐이다. 여기서 한자 ‘원(原)’은 원래의 진면목을 뜻하는 말이거니와 캐묻는다는 뜻을 지닌다. 가장 오래된 용례는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가 그 유명한 「원도(原道)」에서 사용한 경우이며, 비교적 가깝게는 풍우란(馮友蘭,1895-1990)이 사용했는데 「신원인(新原人)」이 그것이다. 따라서 원도(原道)라는 말은 도가 무엇인지 캐묻는다는 뜻이고, 원인(原人)은 사람의 본질을 따져본다는 뜻이다.

나는 하지훈(河芝勳, 1978-)의 예술세계를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원경(原景)으로 풍경(風景畵)의 본질을 묻는 것이며, 또 하나는 원경(原境)으로 경지(境地)를 파헤치는 것이다. 풍경의 본질을 묻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각에 관한 사유이며, 경지를 파헤치는 것은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가능과 한계를 회화의 상징 언어로 구축한다는 의미이다.

하지훈은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현대회화의 거장 미카엘 반 오펜(Michael van Ofen, 1956-)의 지도 아래 학위를 취득했다. 미카엘 반 오펜은 풍경의 본질만을 남긴다. 지각 너머의 세계를 표출하는 것이다. 풍경이 추상이 될 때까지 풍경의 살을 바르고 풍경의 본질, 즉 뼈대만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이는 통상적으로 (사진이나 그림의 일부를) 잘라 낸다는 의미를 지니는 전문 용어 ‘crop’의 방법론이 적용된다. 인간의 즉각적인 사물의 인식, 즉 지각을 넘어서기 위한 철학적 사유에서 출발한다. 지각은 인간적 감각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자면 인간적 바라보기(human vision)에 국한된다. 인간적 바라보기는 인간의 기질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가 「닮음의 한계(The Limit of Likeness)」에서 분석했던 화가의 스타일 문제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나의 시각이 아니라 나의 기질이라는 것이다. 시각의 정확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객관적 시각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고도의 카메라라 할지언정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 그것은 카메라에 내재한 프로그램의 한계에 갇히기 때문이다.

미카엘 반 오펜은 풍경의 뼈대만을 최소화하여 극도의 정련된 풍경화를 나타낸다. 그것은 마치 동아시아의 옛 거장 미불(米芾, 1051-1107)이나 심주(沈周, 1427-1509)가 본질만을 드러내어 경지를 표상한 문인화의 풍격과 닮았다. 미불과 심주가 풍경의 본질만을 최소화된 형체만을 고르고 시성(詩性)을 부여했던 것처럼 미카엘 반 오펜은 자신의 작품에 철학적 사유를 불어넣었다.

저기 있는 사물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나의 인식능력이 재구성해낸 재현인가? 철학에서 전자를 리얼리즘, 즉 사실주의라고 하며 후자를 재현주의라고 한다. 미카엘 반 오펜은 리얼리즘과 재현주의 사이의 어디 즈음에 진리가 있다고 사유했다. 우리가 보는 풍경은 사실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기질에 지배받는다. 이 두 개의 축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물에 비춘 빛과 구조(뼈대)만을 추려내 절제한 것이다.

미카엘 반 오펜이 풍경의 본질을 인간 기질의 최소화로 바라본 데 비해서 하지훈은 풍경의 본질이 구조의 구축이라고 결론짓는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루앙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 연작에서 풍경의 본질을 빛의 변화라고 규정하고 같은 자리에서 다른 시간대에 반복적으로 그렸다. 모네는 여기서 빛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이에 반해 하지훈은 수많은 다른 시간대의 빛과 여타 조건으로 달라지는 풍경을 하나의 화면에 중첩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하지훈은 달리 묻는다. 사람(화가)은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릴 수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을 충실하게.” 그러나 자연이 어찌 예술의 한계 속에 굴복된다는 말인가? 자연의 극단적인 작은 부분도 무한한 것을. 예술가가 그리는 것은 자연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을 다굴 수 있을 뿐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그릴 수 있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1)

하지훈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존재 자체이다. 그런데 하지훈은 리얼리스트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재현주의자도 아니다. 하지훈이 바라보는 존재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사람과 외부세계 사이의 관계에서 천변만화(千變萬化)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지각과 감수성, 그리고 시성의 총체이다. 하지훈이 바라보는 존재는 지각으로 분변되지 않으며,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치 󰡔장자(莊子)󰡕의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혜자와 장자의 대화에서 하지훈은 장자의 의견을 철저히 신봉하는 것이다. 혜자는 물고기를 지식으로 대한다. 따라서 물고기가 즐겁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장자는 물고기를 시적 전체로 대접하기 때문에 물고기의 자유로운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다. 2)

하지훈이 그리는 풍경은 단순히 산의 구조를 철저하게 구축해낸 구성주의도 아니거니와 표현을 위한 표현도 아니다. 매시간 다르게 다가오며 보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신비, 즉 존재에 반응해서 총체적으로 느껴지는 우리의 생명체험을 캔버스 화면에 불어넣어 새로운 회화 언어를 제시하고자 하는 일관된 의지이다.

이진명, 미술비평ㆍ철학박사


1) Ernst Gombrich, “The Limit of Likeness,” in Aesthetics, (ed.) David Goldblatt(London, Routledge, 2017), p 12에서 재인용.

2) 『莊子』外篇 「秋水」15: 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장자, 당신은 물고기도 아니잖아. 물고기의 즐거움을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장자가 응수했다. “당신은 내가 아니잖아,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이 어찌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