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이는 농가의 붉은 지붕, 군데군데 암벽이 드러난 산들, 소실점으로부터 다가오는 길,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과 수면에 비친 나무들… 하지훈의 그림 속에서 전형적인 풍경을 이루는 이 요소들은 그것들의 본래의 자리들로부터 옮겨져 있다. 마치 잘못 맞춰진 퍼즐의 그림처럼 각각의 부분들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거나, 혹은 얇은 단면을 드러낸 채로 배경으로부터 잘려져 있다. 풍경은 마치 구겨진 그림의 파편 혹은 만들다가 만 디오라마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테이블 위 혹은 장소를 알 수 없는 공간을 배경으로 놓여있는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은 적갈색과 황녹색의 강렬한 대비에 의해 금방이라도 풍경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날 것 같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이 그림의 주인공인가? 관객인가, 풍경 속의 인물인가, 아니면 그 중간쯤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셋 다인가?
그림 속에서 재현되는 스케일을 다루는데 있어 하지훈은 독특한 방식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세 개의 시점이 하나의 그림 속에 공존하는데, 첫 번째는 아주 커다란 공간을 다루는 수평적 시점이다. 〈5개의 마을〉 혹은 〈산책길〉과 같은 그림들에서 풍경에 속하는 요소들은 일반적인 시점, 즉 풍경 속을 거닐고 있는 인물의 시점으로 다뤄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 풍경 속을 거닐고 있는 인물의 가장 평범한 시점인 것이다. 두 번째는 조감(鳥瞰)하는 시점으로, 이로 인해 풍경이 그려져 있는 부분은 일종의 편평한 면, 즉 언제라도 오려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물로 변환된다. 그림 속의 풍경은 그림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재현되어 있는 종이 혹은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상당히 좁은 실내공간 안에서 사물을 약 45도 각도로 바라본 시점이다. 마치 좌대 혹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조각을 바라보는 듯한 이 시점으로 인해 급격한 스케일의 왜곡이 일어난다. 예컨대, 〈개체적 풍경상〉 연작 등에서 보이는 커다란 풍경의 거리감과 그것의 배경으로 그려진 좁은 실내공간의 모서리는 구체적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지시하고 있다. 이 때 시선은 그림 바깥이 아니라 그림의 안쪽에 재현되어 있는 실내공간 안에 존재한다. 이 세 가지 시선- 각각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풍경이 재현되어 있는 화면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재현된 화면이 놓여 있는 실내의 재현을 바라보는 시선에 이르기까지 -은 동일한 하나의 시점, 즉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점 위에서 중첩되고 있다. 이것은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언급한 바 있는 시점의 중첩을 떠올린다. 관객은 그림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생산하는 서로 다른 시선들의 주체들로 분열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회화란 주체를 생산하는 장치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은 재현(representation)과 제시(presentation)의 경계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회화의 기원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그 하나인 재현(representation)은 대상의 드러냄, 혹은 포획(capture)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회화를 통해 포착하고 포획하는 과정을 통해 유, 무형의 가시화를 통한 생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시(presentation)로서, 가시화된 대상을 배열하는 방식을 통해 그것에 수사(rhetoric) 혹은 용법을 부여하는 것이다. 재현과 제시의 구조적 결속은 ‘보는 것 자체가 그것의 용법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상황을 야기한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뒤샹의 ‘에탕 돈네’가 될 것이다. 문 위에 나있는 구멍에 눈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작품의 순환적 메커니즘을 완결시키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하지훈의 작품 속에서도 회화적 결과물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은 곧 그 회화가 제공하는 무대 위로 오르는 효과를 제공한다.
극적 공간의 연출을 통해 하지훈이 만들어내는 것은 다양한 내러티브로 조합될 수 있는, 미니어쳐와 같이 매우 쉽고 간단하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대상이 지닌 ‘유희’의 잠재성이다. 그는 스케일의 왜곡에 의한 연출(mise-en-scène)을 통해 관객의 개별성을 반영하는 듯한 독립된 개체들을 만들어낸다. ‘개체적 풍경’(individual landscape)은 아마도 ‘개별적 반영’(individual reflection)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려져 있는 것은 관객의 위치를 지시하는 구조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심상(心象)이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많은 경우에 대상은 화면의 중심에 위치하며 마치 인물화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세부와 인상, 그리고 다면체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지닌다. 풍경은 인물인 것이다. 각각의 풍경-존재들은 그것들을 떠받치는 바닥-대지 혹은 바닥-수면을 가지고 있으며 받침대처럼 적당히 잘려져 화면 위에 대상을 일으켜 세운다. 마분지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이 개체-풍경들은 언제라도 새로운 모습으로 놓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들은 실제 오려진 종이들이 아니라 회화적 재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대상의 진정성이 아니라 그것 역시 테마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의미의 부재를 연출하는 추상성의 무대로 변환될 수 있다. 예컨대, 그의 그림들 속에 재현되어 있는 풍경들은 사실적이거나 세부적이 될수록 무대를 더욱 추상적인 장소로 만들 어낸다. 여기에서 하지훈의 회화에 대한 또 다른 물음이 제기된다. 회화는 이 수사적 배치들을 재현하는 것에서 머무는가? 혹은 이러한 수사 자체의 목적에 대해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재현적 풍경과 재현적 사물과 재현적 공간의 중첩된 제시가 회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지훈의 경우, 그는 이러한 질문들을 기존의 무대를 부분적으로 해체한 일종의 확대된 이미지의 형태로 제기한다. 그는 〈풍경-흔적들〉에서 전체적인 풍경의 잔해, 혹은 클로즈-업된 부분의 순간적으로 관찰된 이미지들을 단적으로 생략된 붓터치와 색채들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훈은 회화적 기호들-색채, 붓질, 물감 등-로 짜여진 기본적 어휘들, 매듭들이 이 모든 체계에 존재의의(raison-d’ê̂tre)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상이한 기억과 서사를 지닌 회화적 존재들이다. 그것들을 이어주는 것은 극적 공간만큼이나 회화적 연속성이다. 독립적인 세계로서 회화는 화가-관객-등장인물의 시점적 중첩을 통해 그것의 바깥과 연결되기도 하고 그 세계 내의 존재들에 개별적 존재들로서의 대체-불가능성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훈의 회화는 한국의 회화사에서 흔히 다루어지지 않은 미술사의 특정한 전통을 떠올린다. 그것은 르네상스의 아나모르포시스에서 벨라스케스, 홀바인, 마네, 뒤샹 등으로 이어지는 극적 장치로서의 회화의 전통이다. 그것은 지식과 꿈, 유사성과 무의식의 영역을 교차시키며 일상과 직관, 속도와 지속성을 하나의 천으로 직조한다. 박식함과 시적 영감, 상상력과 시각적 인지의 이면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져 있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이렇듯 독특한 예술적 노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시각적 전통 속에서의 연속성은 동시대미술의 파노라마 속에서 회화가 차지하고 있는 의의가 여전히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유진상(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