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하지훈의 개인전 〈회화를 위한 소조 : Modeling For Painting〉에는 어떤 덩어리들이 있다. 그림 속의 덩어리와 조소 작품으로 표현된 덩어리 형상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훈의 작품에서 보이는 덩어리는 돌이나 숲, 섬과 같은 사물을 지시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2014년 열린 개인전에서 구체적인 장소가 드러난 풍경을 그렸다. 장소와 사물로서의 숲과 섬, 돌 등에 자신의 감성을 입혀 독특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리 구체적이지 않다. 화가의 무의식과 내면세계에서 길어 올린 풍경(또는 형상)들은 선과 면과 색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덩어리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이 덩어리들은 각각의 형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호한 형태들은 나름의 결을 가지고 흘러넘칠 듯 보인다. 내부에는 연약한 무언가가 엉겨 붙어 있고, 그러나 곧 강인하게 힘을 내며 쭉쭉 뻗어나간다. 선과 선, 면과 면이 만나 흘러넘치고 경계가 없어지며 하나의 입체인 덩어리로 수렴되는 듯 보인다. 결코 넘치지 않는다. 그저 더 깊이 들어갈 뿐이다. 그 사이에 화가의 몸이 있다. 붓보다는 손가락과 손날과 손바닥으로 그려낸 그림은 화가의 손과 숨과 걸음을 짐작케 한다. 화가의 몸은 무의식과 캔버스 사이의 매개가 되어 움직인다. 캔버스에 올린 두툼한 마티에르는 마치 형상을 ‘빚어낸’ 듯한 인상을 주고, 전시장 가운에 설치된 조소작품은 실물로서 그러한 질감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캔버스가 2차원적인 평면에 ‘그것’을 표현했다면 조각은 ‘그것’의 3차원적 형상이다.
그의 작품은 엘리스가 떨어진 토끼 굴처럼 은밀하고 내밀하다. 그의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내가 몰랐던 또는 알지만 생각하지 않았던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다. 몰래 서랍을 열어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누군가가 문을 살짝 열어놓고 내 이야기 하는 것을 듣는 것처럼 그의 작품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림을 천천히 보게 된다. 시각으로 느껴지던 그림은 색과 마티에르로 인해 곧 만져진다. 천천히, 아주 은밀하게, 우리는 작가의 내면의 결을 눈으로 더듬는다. 거친 선이 휘몰아치며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눈은 정확히 질감을 더듬고 선을 따라가며 마음의 결을 만진다. 보임은 만짐이며, 만짐은 화가의 몸과 보는 이의 몸이 함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무엇이 정확하게 이러한 형상을 만들어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건 내면의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덩어리들은 그 자체로 구체적이다. 그것 자체로 끓어오르고 또 사그라드는, 닳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은 거기에 있다.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고도 하고 변한다고도 한다. 변화함과 변화하지 않음을 무한히 반복하여 영구적이고 견고해진다. 화가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형상이 나온다. 흘러넘치고, 수렴되며, 깊숙이 들어간다. 이 과정은 반복된다. 그렇게 하지훈의 풍경은 견고해진다. 이 그림이 말하는 게 무엇인가 같은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될테니.
이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