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지훈은 ‘그림’을 그린다. 그림/회화란 일정한 표면/평면에 일루젼을 발생시키는 장치이다. 혹은 화면에 하나의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납작한 지지대위에 물감과 붓질로 이루어지는 모종의 행위이다. 물론 물감/붓질은 다른 재료와 수단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하여간 그것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도 있고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을 질문하면서 그 조건의 한계를 그림의 내용으로 담아낼 수 도 있으며 혹은 회화를 이루는 여러 조건들의 물질성 자체를 극대화하는 수도 있다. 물론 그 외에도 회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 해석은 무궁하다. 회화가 서식하는 평면의 화면은 물질적이기도 하고 심리적이자 정신적인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훈의 그림은 물감과 붓질에 의해 구성된 모종의 형상/덩어리가 화면 중앙을 ‘조각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평면적으로 칠해진 바탕 면에서 입체적인 덩어리(산, 섬)가 부감되는 형국이다. 물론 그 덩어리 내부는 물감의 다양한 상황을 보여주거나 물감의 물리적 상태를 풍경처럼 보여준다. 물감이 특정 도구의 일정한 압력에 의해, 속도와 시간에 의해 혹은 작가의 신체성에 의해 밀려나가고 씻긴 자취 등으로 얼룩져있다. 어쩌면 작가는 물감이 외부적 조건과 연계되어 파생시킨 여러 상황성을 안겨주고자 하는 그림으로 보인다. 물감의 물리적 표정, 평면적 붓질이 모여 일루젼을 주는 동시에 물감 그 자체로 부단히 환원되는 과정이 읽혀지는 그림이다. 물감이 자아내는 순수한 물리적, 촉각적인 붓질(몸짓)과 함께 두드러진 마티에르 등은 이 그림을 추상과 개념적인 회화로 읽히게 한다. 동시에 뒷걸음질 치면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면 화면은 이내 풍경을 떠올려준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여전히 전통적인 구상화, 풍경화의 전형성을 떠올려준다. 안정적인 수평선과 수직으로 융기한 섬이나 산을 연상시키는 형태가 맞물려서 수직과 수평의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일반적인 풍경화의 관례를 따르고 있는 재현회화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재현성에 균열을 이루는 것은 내부를 채우고 있는 다소 혼돈스러운 붓질과 카오스적인 물감의 엉킴, 흘러내림, 뭉개짐 등이다. 물감을 다루는 작가의 신체성이 고스란히 감촉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색채를 지닌, 색채의 스펙트럼이 넓고 화려해 보이는 물감의 집적은 색을 구체적인 사물의 지시나 재현에서 벗어나 모종의 상황성을 안기는 질료적인 측면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작가의 색은 온갖 다양한 색을 한 공간에 섞어서 쓰는 편이다. 색의 구별을 없애는 시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작가에게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색이란 없다고 본다. 당연히 모든 색은 화면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거나 다채로운 색을 속도, 시간, 힘 등에 의해 변형태로 만들어 보여준다. 그러는 순간 색/물질은 낯선 질감과 감각을 발생시키는 존재가 되어 유동적인 생명체처럼 자리하고 있다. 화면이 살아있거나 생성적이거나 활성적인 존재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정적인 부동이 자세로 자리한 덩어리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활력이 느껴지고 동적인 흐름이 감지되는 역설이 빚어진다. 그런 측면에서 하지훈의 그림은 세잔의 풍경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단속적인 붓질의 흐름과 한색과 난색의 교차와 충돌로 이루어진 세잔의 회화는 납작한 캔버스의 평면 안에서 물감과 붓질, 색채만으로도 깊이와 입체감, 심지어 사물의 견고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편이다. 그런 측면에서 하지훈의 그림은 세잔의 조형의식과 조우한다. 화면의 중심부에 설정되어 보는 이의 시선에 우선적으로 걸려드는 이 섬/산 이미지는 물감의 물성, 색채 감각, 그리고 회화가 뿜어내는 묘한 아우라 등을 보여주기 위한 매개로 호명된다. 물감을 바르고 문지르고 밀고나가며 마치 동양화의 획을 치듯이 운행되는 붓놀림, 순간적인 동작과 직관적인 칠하기로 인해 발생하는 효과 등은 분명 기존 붓질과는 다른 감각을 발생시키려는 특이한 붓질에의 모색으로 보이며 이러한 방법론의 특이성을 통해 표면에 미묘한 감각을 발생시키고 낯선 느낌을 자아내려는 연출로도 보인다. 어쩌면 이런 방법론이 작가가 시도하는 회화의 새로움(?)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어딘지 영상적인 잔영을 연상시킨다.

2.

회화는 캔버스의 표면, 피부위에서 서식한다. 그곳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지시하거나 관념적인 공간을 떠올려주거나 생성한다. 따라서 회화의 표면은 기이한 장소다. 서구 전통회화가 내부로 하염없이 들어갔다면 모더니즘은 평면성이라는 물리적 조건만을 강박적으로 추구했다. 반면 오늘날 회화는 새삼스레 다시 ‘표면’에 주목하는 것 같다. 그 표면성은 모더니즘과는 조금 달리 안과 밖의 경계에서 간절하게 생을 영위하는 것도 같다. 하여간 그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사고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동시대 회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표피성, 껍질에 천착하고 있는 것 같다. 새삼 그 표면을 거점 삼아 새로운 회화, 회화에 대한 회화, 아니 회화를 넘어서는 회화(메타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회임하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도 보게 된다.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인 표면에 대한 독자적인 인식과 상상력 및 해석, 그리고 그것을 외화 하는 붓질에 의해 그런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화는 부단히 환생하고 새로이 호명된다. 새삼 오늘날 회화는 이제 저마다 그 표면에 저마다의 방법론, 매너로 그림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방법론이라는 게 단지 기발하고 낯선 재료의 사용이나 전통적인 회화적 재료를 넘어서는 이질적 재료들의 접목으로 전개되는 이전의 방법론(70, 80년대 미술계에서는 흔히 ‘새로운 방법론’이란 제목의 전시들이 곧잘 이루어졌었다)과는 다른 방향으로 번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훈의 그림은 일종의 풍경이면서도 붓질, 물감의 흔적들이다. 구상이자 추상이고 질료덩어리다. 나로서는 그의 그림이 무엇보다도 붓질의 방법론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붓질 대신에 붓질을 암시하는 손, 막대를 비롯한 다양한 도구를 끌어들여 물감을 바른다. 물감을 바르는, 칠하는 특별하고 낯선 방법, 매너로 인해 이질적인 상황, 감각을 표면에 안착시키고자 한다.

붉은색조가 두드러진 화면은 거대한 색 면 추상의 흔적도 어른거리지만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섬을 그린 ‘심플’한 풍경화로 다가온다. 화면의 중심부에는 커다란 덩어리(섬 이미지)가 차지하고 있고 그 내부는 다채로운 색상의 물감, 붓질로 채워져 있다. 그 덩어리는 화면 하단에서부터 차올라 화면 상단으로 솟아오르는 형국이다. 따라서 그림을 감상하는 관자의 신체 앞에 단독으로 설정된 저 섬의 위용이 다소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화면 안의 섬/이미지가 화면 밖의 관자의 신체와 비교적 긴밀한 연관관계를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단일한 색 면으로 칠해진 바탕과 수평선이나 대지를 연상시키는 하단이 대조를 이룬다. 수직과 수평으로 구분된 단호한 화면 구성이다.

이것은 분명 섬에 관한 인상적인 형상이다. 그러나 특정한 섬의 재현은 아니다. 섬의 형상을 빌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표현이 옳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매개로 섬의 형상이 요구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섬은 또한 작품의 주제의식을 반영하는 희미한 단서로도 분명 기능한다. 최소한의 기능! 작가에게 그것은 모종의 풍경을 대변한다. 어린 시절 경험한 잦은 이사, 바닷가와 섬에 대한 추억, 낯선 이국땅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반추하기 위한 그림이기에 ‘풍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섬을 닮은 풍경, 거대한 덩어리로 내 앞에 자리한 저 존재가 호명되었다. 그러니까 그림 안에 자리한 풍경, 섬으로 보이는 이미지/덩어리는 그림을 그리기위한 최소한의 매개이자 그림을 그려나가기 위한 작가 자신의 감정과 내용, 나름의 서사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단서로서 자리한다. 작가는 그동안 접했던 풍경에 대한 인상, 기억, 누적된 시간과 감정을 응축해서 하나의 덩어리 안에 응고시키고자 했다. 섬의 형태를 닮은 덩어리는 섬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도상)이자 오랜 시간 풍경을 보면서 발생한 온갖 기억, 감정 등 시각화하기 어려운, 곤혹스러운 모든 것들의 표현/표현될 수 없음의 토로에 해당하는 몸짓을 함축하고 있는 덩어리/공간이다. 그 공간을 또한 재현과 비재현의 사이에서의 갈등구조를 드러내는 붓질이 가득 채우고 있다.

섬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붓질은 구체적인 풍경의 세부를 묘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과는 무관한, 자발적인 붓질, 색채들이다. 특히 강약의 조절과 붓에 의존하기보다는 손과 막대기, 나이프 등의 도구를 활용해 물감을 문지르고 누르고 밀고 나가는 등의 제스처로 이루어진 그림은 묘한 기운과 힘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전적으로 추상적이다. 외부세계를 재현하거나 묘사하는 대신에 붓질, 물감, 색채, 물성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작가의 감정, 기억, 복합적인 여러 정서의 편린들이 잠복해있고 그 이름 지을 수 없는 모호함을 대신하고 있는 ‘이미지/물질’이기도 하다.

3.

작가는 자신의 육체에 각인된 풍경의 경험을 다시 내놓는다.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육체를 써서 삶의 구체성에 부닥치는 것이다. 인간이 세계와 직접 맞닥뜨릴 수 있는 그런 관계를 갈망한다. 그것은 삶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에 직접 맞닥뜨리면서 그런 길을 모색해나가려는 제스처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회화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살아있는 육체가 하는 일이고 살아있는 팔의 근육이 한 획을 그음으로써 이 세계를 바꾸는 것”(김훈) 이다. 그것은 인간의 관념적인 조작으로는 도저히 하지 못하는 일이고 오로지 살아있는 인간의 팔의 근육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 붓질로 인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낯설고 새로운 것이 기어 올라온다. 그림이란 무엇보다도 외부 세계/대상과 작가 자신의 육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작가는 육체를 통해 주어진 외부 세계를 보고 느낀다. 이를 화면에 옮기는 것이 그림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미묘하고 섬세한 조건, 신체적 조건이 개입된다. 우리들의 몸은 운동하면서 지각한다. 그림이란 결국 육체적 신경조직이라는 생산수단이 세계에 대한 자신의 개념과 표상이라는 재료에 가한 철학적 노동의 산물이다. 미술이란 인간 지각의 문제에 가장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예술이다. 미술은 지각이나 감각의 모든 틈과 변주를 꿈꿔볼 수 있는 장르이며 그런 자기 자신을 반성의 대상으로 올려놓을 수 있고 또한 타 예술영역 자체의 매체적 특수성을 영화, 사진 등의 매체 자체에 관한 지각적, 정치적 반성의 내용을 다룰 수 있다. 감각과 지각에 대한 반성적 사고로서의 현대미술의 자기정체성이 그것이다. 일종의 ‘지각의 정치학’, ‘장르의 정치학’을 일컫는다.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것은 육체(감각, 감성)를 통해서이고 새로운 육체의 구성이란 세계 지각의 새로운 정향성의 길을 트는 것이다.

하지훈이 붓을 대신해서 손, 나이프, 막대기 등을 통해 자신의 몸, 신체성을 직접적으로 실어 나르거나 또는 붓질로 이루어지는 그림의 관행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방법론은 기존 회화의 한계, 혹은 정형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읽힌다. 관습적인 회화의 패턴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발생시키려는 표면에의 욕구가 그와 같은 방법론, 스타일을 호출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이 효과적인 표면 내지는 새로운 감각을 발생시키고 있는가는 좀 어려운 문제다. 그것은 단지 방법론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와 다른 감각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달리 보는 것,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방법론의 도출이 문제일 것이다.

4.

현대라는 것은 역사적 연대기 상의 고정된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되려는 노력의 표현’(서동욱)을 지칭한다. 현대미술 역시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과거의 미술에서 벗어나 미술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전개하려는 시도를 일컬어 현대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미술 개념과는 다른 식으로 미술을 사유하는 방식이자 관행화된 방법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진정한 현대미술이란 현재의 삶과 문화에 대응해 그것에 대한 올바른 사유에 바탕을 둔 미술적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동시대라는 시기에 국한되어 있는 미술행위를 일컫는 말은 아니다. 진정한 현대미술은 현대라는 시기의 삶이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문제들에 미술이 밀착하고 대응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철학이나 미술은 유사한 과제에 시달린다.

고정된, 절대적인 미술의 어법이란 없다. 미술이란 개념도 늘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단련된다. 니체는 고정적 진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진리의 나타남이란 ‘관점 수립의 문제’이다. 새로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존의 가치와 진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며 그 기존의 가치를 비판에 부치는 것이 바로 ‘힘의 의지’다. 존재자들이란 힘의 외관이기에 힘의 의지는 존재자들이 서로 부정하지 않고 차이를 지닌 상태로 나타나게 해주는 요소이다. 다시 니체에 따르면 존재자들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다른 존재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다른 존재자와의 차이를 지닌 체 자신의 본성 가운데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니체를 이은 들뢰즈를 비롯한 탈근대철학자들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나’에 집착하는 존재론을 깨는 것이 되었다. 관건은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아우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생성’이라는 것이다. (강신주) 그리고 ‘나’를 알려면 “문밖”의 ‘낯선 기호’(들뢰즈)와 부딪쳐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유가 발생한다.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으면 사유와 생성과 변화는 없다. 변화의 계기는 낯선 기호인 다른 사람과의 마주침에서 온다.

니체에 의해 우리는 현대미술이 결국 관점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단일한 하나의 이념, 관점은 부재하다. 불가능하다. 회화에 대한 유일무이한 하나의 독점적인 관점은 부재하다. 그림은 결국 개별적인 주체들의 저마다의 감각과 세계관, 기호와 취향, 그리고 자신들의 미술에 대한 신념과 인생관에 의해 선택되고 해석된다.

5.

미술에 대한 개념이 모방론 혹은 표현론의 차원에서만 해석되고 수용되어 대부분의 그림들이 재료와 과정을 강조한 일러스트레이션의 가까운 것이 대부분이라면 그와 다른 맥락에서 회화를 개념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지적 개입 및 게임이 가능해진 즉, 회화의 존재방식과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 개념적으로 적극적인 성찰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일상과 구체적인 경험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한편, 그림 그리는 일과 삶을 분리시키지 않는 선에서 작업을 끌어올리는 경우도 최근에서야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다. 분명 최근 회화는 이전 시대에 비해 다양체를 지향하며, 촉각적 직감과 시간성의 개념 등을 중요시하고 있다. 회화에 대한 여러 구멍과 틈을 만들고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는 참신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시에 보수적인 매체로서 시장에 종속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평면 회화 전시가 두드러지게 증가했으며 회화 관련 기획 전시나 개인전들이 줄을 이었고 각종 아트페어에서도 회화가 주류를 차지한 듯하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 화단은 겉으로는 회화의 부흥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스타일이나 방법론의 획일화나 유사한 작업으로의 경사 등도 눈에 띄고 단지 손에 기능이나 묘사력에 의존하면서 회화의 복원 내지는 손의 회복 같은 거창한 의미로 포장하거나 작업의 알리바이로 삼으려고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미술시장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일련의 아트페어에 특정지어 구상 화가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고 그들이 공들여 잘 그린 그림들 (기량의 극대화, 놀라운 환영주의, 익숙한 인테리어) 이 시장과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다든가 젊은 작가들이 극사실주의나 팝아트에 가까운 그림들을 집단화해서 그려내는 것이 유행하고 있음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미술시장의 오랜 침체와 불황은 시장에서 ‘변함없이’ 팔리는 평면 회화에 대한 관심으로 파급되고, 이는 많은 작가들을 회화로 불러 모으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미술시장의 지나친 상업화는 장식적이고 눈속임에 근거한 진부한 구상 회화를 거침없이 양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술의 담론과 내용, 가치와 질, 사회적 효용성보다 자본과 경제성이 가장 큰 논점이 되며, 작가들 역시 결국 ‘표면과 스타일’에 치중하게 된다. 최근의 회화는 매우 세련되고 다양해진 것 같지만, 스타일은 점차 획일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또한 잘 만들어진 화려하고 놀라운 표면을 지녔으나, 그 속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는 빈약하거나 실종된 경우도 많다.

그러나 오늘날 더 이상 미술에서 주류와 중심권의 강한 영향력은 사라졌기에 미술에 대한 복수적 사고가 가능해졌고 그만큼 예술, 미술과 회화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지역, 성, 인종, 그리고 역사적 계보에 정당성을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좀 더 자유롭게 자르고 통행할 때 새로운 회화의 영감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서구에서 강조되던 역사적 중심 시각의 와해가 이들로 부터의 해방은 우리가 받아들이던 미감이 익숙함과 관념에 강조점들로부터 (독창성, 창조성, 새로움 등) 회화를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껏 우리가 회화에 대해 이만큼이라도 다양하게 사고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와서라고 여겨진다.

최근의 회화는 오늘날 급변하는 문화 환경 속에서 회화의 향방과 화가의 위상을 질문하는 것이 주된 기류인 것 같다. 따라서 그것은 그림에 대한 그림, 일종의 ‘메타-그림’의 성격을 띠고 진행한다. 개념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철저히 개념적인 차원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며 감정을 자극하는 회화의 오랜 전통에 뿌리내리는 그림들도 번성한다. 오늘날과 같은 이행기에 설치미술이나 컴퓨터아트로 전환하지 않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회화작품을 고수하는 것은 회화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만 아니라면 회화의 역할과 위상을 나름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회화는 개념적인 것과 지각적인 것이 직접 마주치는 장이자 신체-자연의 비개념적인 운동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는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보면 회화의 본질은 한때 모더니즘에서 강조되었던 것처럼 단순히 평면성이라든가 형상성, 색채, 개념성 등의 어느 한 측면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마주치고 겹쳐지는 형국 속에서 형성되는 특이점들의 역사적 변환에 따라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회화의 본성은 다중성과 복수성,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긴장관계 그 자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회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되는 때에 과거의 환원주의적인 편협성을 벗어나 본래의 다층적인 복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올바로 포착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여기서 회화는 영상매체의 확산과정에서 점진하는 탈신체화 경향에 대해 효과적인 시각적 비판과 대안의 시각문화를 구성하는데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한편 여전히 인간 육체와 환경간의 생태적 관련 속에서의 회화야말로 인류가 지속되는 한 포기할 수 없는 무한한 문화적 행위이자 인간적 삶의 실천을 매개하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나온다. 그런 인식이 최근의 회화를 새롭게 부흥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림 안에서 다양한 표현의 성질들을 점검하는 하지훈의 그림은 일종의 메타회화적 성격이 강한 그림이다. 그는 구상과 추상, 내용과 형식, 붓질의 속도와 차이, 완급의 조절, 명확함과 모호함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일종의 경계에서 머무는 그림인 셈이다. 작가는 그렇게 경계에 위치한, 위치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회화의 운명을 즐기는 것도 같다. 아니 그런 경계만이 회화가 머물 수 있는 자리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